삼척동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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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선인(先人)들의 독도 인식과 항해
이효웅 해양탐험가  |  sd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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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3.31  14: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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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은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TV.스마트폰 액정에 쓰이는 3가지 품목을 포괄적 수출허가 대상에서 개별 수출허가 대상으로 변경하였다. 이에 국내에서는 일본상품 불매운동이 번지기 시작했고 일본의 보복성 수출규제로 한일외교갈등이 악화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지난 7월 23일 러시아 군용기가 독도 인근 한국 영공을 침범하여 한국 공군기가 경고사격을 하였다. 이를 두고 일본 정부는 한국과 러시아 정부에 각각 “우리(일본) 영토에서 이러한 행위를 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억지 주장을 했다.

특히 러시아 측은 자국 군용기가 독도 영공을 침범한 것과 관련해 한국 정부에 깊은 유감을 표명했다. 일본 정부가 독도를 자국 영토라 주장하며 한국과 러시아 정부 양국에 항의했지만 공식적인 사과를 한국 정부에 한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독도가 한국 영토란 걸 국제사회에서 다시 한 번 증명한 셈이 됐단 전문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에 본지에서는 우리 선인들의 독도 인식과 어떻게 독도를 알게 되고 왕래하였는지에 대하여 다시한번 재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필자는 2002년 7월 29일, 1인용 해양탐사선 코스모스호를 자작하여 독도에 단독 입도하였다. 합판 두 장(480x120cm,0.5톤) 크기에 FRP로 제작하여 50마력 선외기를 장착하고 동해 어달항에서 출항해 울릉도·독도탐사에 성공하고 8일 만에 귀항하였다. 이후 보트, 요트, 범선, 함정 등을 이용하여 13회에 걸쳐 독도·울릉도 탐사를 하였고, 범선을 이용하여 카약으로 독도·울릉도 해식동굴 탐사를 4회를 하였다.

울릉도·독도 해역에는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조경수역이 있는데, 옛 부터 이 지역에는 수종(水宗)이 있어 항해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필자도 저기압이 지날 때 안개와 파도가 일어 항해하기 어려웠다.

그동안 필자의 여러 가지 항해 경험과 해류병을 이용한 동해 해류연구와 울릉도·독도 사진촬영을 통해 ‘선인들의 독도 인식과 항해’를 추론해보자고 한다.

선인들의 독도 인식

512년 6월, 이사부는 목우사자를 앞세워 우산국을 복속하여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였다. 이후 왜는 200여 년간 신라를 침범하지 못하였으므로 신라와 왜는 독도를 알지 못하였다고 본다.

930년(고려 태조13) 우릉도(芋陵島)에서 백길(白吉)과 토두(土豆)를 보내 토산물을 바치었고, 1032년(덕종1)에 우릉성주(羽陵城主)가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 래조(來朝)하고 토산물을 헌상하게 했다. 이때부터 우릉(于陵)이 우릉(羽陵)으로 글자가 바뀌는데, 필자는 우릉(羽陵)은 잘못 써진 것 보다 우산국(독도)와 무릉도(울릉도)를 합친 글자라 생각한다. 독도는 쌍 섬으로 멀리서 보면 양 날개를 펼친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릉(羽陵)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고려 초부터 독도를 알고 사용했다고 본다.

1412년(태종12)에 유산국도(流山國島) 사람 백가물(白加勿) 등 12명이 고성(高城) 어라진(於羅津)에 와서 정박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무릉도(武陵島)에서 생장하였는데, 그 섬 안의 인호(人戶)가 11호이고, 남녀가 모두 60여 명인데, 지금은 본도(本島)로 옮겨 와 살고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무릉도 주민들은 동쪽바다의 무인도(독도)를 알았을 것이고, 무릉도 주민들이 육지에 살면서 신비의 섬 울릉도·독도 이야기는 이웃에 삽시간에 전해졌으리라 짐작한다.

1416년(태종16)에 호조 참판(戶曹參判) 박습(朴習)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강원도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로 있을 때에 들었는데, 무릉도(武陵島)의 주회(周回)가 7식(息)이고, 곁에 소도(小島)가 있고, 전지가 50여 결(結)이 되는데, 들어가는 길이 겨우 한 사람이 통행하고 나란히 가지는 못한다고 합니다. 옛날에 방지용(方之用)이란 자가 있어 15가(家)를 거느리고 입거(入居)하여 때로는 가왜(假倭)로서 도둑질을 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무릉도(武陵島)는 울릉도를 가르치고 소도(小島)는 오늘날 죽도를 가르치며 특별한 이름이 없었다. 조선 초부터 울릉도 사람들의 왕래로 울릉도 주변 정세를 알기 시작하였고, 나라에서는 본격적으로 김인우를 안무사로 임명하고 울릉도 정세를 살피게 하고 울릉도에 도항한 백성들을 데리고 왔으며, 김인우는 울릉도를 세 번(1416년,1417년,1425년)이나 다녀왔다. 김인우(金麟雨)를 우산(于山)·무릉(茂陵)등지 안무사(按撫使)라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나라에서도 우산과 무릉 두 섬을 알고 있었고 두 개의 섬을 살피는 책임을 지게 되었다. 무릉(茂陵)은 전부터 울릉도를 나타내었고, 우산(于山)은 무릉 보다 앞에 쓰므로 무릉 보다 더 중요하거나 울릉도 부속 섬 전체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죽도(竹島)를 나타내는 말은 아니다.

독도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은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강원도>삼척도호부>울진현 편에 (于山, 武陵二島在縣正東海中【二島 相去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우산(于山)과 무릉(武陵) 2섬이 현의 정동(正東) 해중(海中)에 있다. ‘2섬이 서로 거리가 멀지 아니하여, 날씨가 맑으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고 하였다. 죽도는 울릉도 동쪽에 있으며 남북으로 700m, 동서로 400m 정도 되는 평평한 섬으로 저동항에서 4km, 내수전에서 3km, 관음도에서 2km 정도 떨어져 있어 항상 볼 수 있는 섬이고 비상시에는 연기로 연락을 취하기도 한 가까운 섬이다.

선인들의 독도 인식 기록은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것보다 먼저인 1416년(태종16) 이전에 독도를 알고 있었다. 김인우를 ‘우산(于山)·무릉(茂陵)등지안무사’라 하였으므로 무릉은 울릉도를 나타내며 우산은 독도를 포함한 울릉도에서 보이는 부속 섬 전체를 나타냈다고 본다.

예전에는 항해장비 없이 사공들의 경험과 감각으로 항해를 하였다. 그러므로 멀리 떨어진 울릉도를 가려면 바람의 방향과 바람의 세기, 계절풍, 해조류 등을 가늠해 항해했다. 사공의 판단력이 절대적이어서 사공의 능력에 따라 조업 및 상업을 하므로 결과도 많이 달랐다. 다행히 동해 가운데 우뚝 솟은 984m의 성인봉은 멀리서도 잘 보이므로 동해의 이정표였고, 섬에 다다르면 섬이 높고 커서 어느 방향으로 바람이 불던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면 잔잔하여 항구처럼 안전하게 정박하지는 못하여도 피항지 역할을 하였다.

울릉도는 비교적 쉽게 갈 수 있으나 독도는 더 멀고 작으므로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독도를 발견하는 경우는 대부분 강한 바람으로 인해 황천(荒天)에서 사방을 헤매다 겨우 만날 수 있는 섬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독도를 보았거나 독도에 상륙하였어도 믿지 않기 때문에 소문만 있고 실제로는 볼 수 없는 울릉도 동쪽에 있는 작은 섬으로 알려져서 사람마다 우산도, 요도, 삼봉도 등으로 불러졌다.

1476년(성종7)에 동해 양양 앞 바다에 이상향의 섬인 요도(蓼島)가 있다고 소문이 나서 섬에 도망간 사람들을 불러들이려고 섬을 찾으러 나섰다.

함경도 관찰사는 김자주와 송영로(宋永老), 그리고 전일(前日)에 갔다 온 김흥(金興)ㆍ김한경(金漢京)ㆍ이오을망(李吾乙亡) 등 12인에게 마상선(麻尙船) 5척(隻)을 주어 삼봉도를 찾게 하였다.

‘지난 9월 16일에 경성(鏡城) 땅 옹구미(甕仇未)에서 배를 출발하여, 섬으로 향해 같은 날 부령(富寧) 땅 청암(靑巖)에 도착하여 자고, 17일에 회령(會寧) 땅 가린곶이[加隣串]에 도착하여 잤으며, 18일에는 경원(慶源) 땅 말응대(末應大)에 도착하여 잤고, 25일에 섬 서쪽 7, 8리(里) 남짓한 거리에 정박하고 바라보니,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巖石)이 벌여 섰으며, 다음은 복판 섬이고, 복판 섬 서쪽에 또 작은 섬이 있는데, 다 바닷물이 통합니다. 또 바다 섬 사이에는 인형(人形) 같은 것이 별도로 선 것이 30개나 되므로 의심이 나고 두려워서 곧바로 갈 수가 없어 섬 모양을 그려 왔습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나라에서는 요도(삼봉도)를 찾으려고 하였으나 실제 다녀 온 것은 요도(삼봉도)가 아니라 무릉도(울릉도)에 다녀왔다. 독도(삼봉도:요도)는 멀리서 보면 하나, 둘, 셋(동도, 서도, 탕건봉)으로 보이므로 삼봉도라 부르게 되었다.

세종 때부터 찾기 시작한 요도(蓼島)는 성종 때 와서도 찾지 못하고 결국 포기하였다. 요도는 황천에서만 보이고 다녀 온 사람도 다시 찾으려면 찾을 수 없는 미지의 섬으로 결국 우산국의 우산도(于山島)로 불리게 되었다고 본다.

울릉도 성인봉이나 높은 산에 오르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방을 살피게 되는데, 삼척영장 장한상은 1694년 ‘울릉도 사적(事蹟)’에서 “비가 멈추고 안개가 걷힌 날에, 우리는 성인봉을 오르고, 2개의 정상을 보니, 북쪽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고, 또 하나는 하늘에 우뚝 솟아 남쪽으로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삼봉인 것을 알았습니다. 서쪽을 보고, 우리는 수평선에서 대관령 산맥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동쪽 바다 속으로 진방(동남동)에 어딘지 섬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울릉도의 1/3정도이고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울릉도와는 불과 300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섬이 없어 그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는데 울릉도의 지리적 형세는 아마도 저 나라와 우리나라 사이에 있는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독도의 방향, 거리, 크기 등을 설명하였고, 대관령(태백산맥:두타산 165km)이 보인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장한상은 울릉도에 일본인들이 쳐들어 왔다하여 울릉도를 지키고 조사하기 위하여 울릉도를 샅샅이 조사하고 돌아왔다. 이후 나라에서는 울릉도에 숨어 사는 조선 해민들을 데려오고 일본 해민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울릉도를 2-3년마다 정기적으로 수토(搜討)하였다.

선인들의 독도 항해

일본에서 울릉도·독도를 항해하는 곳은 오끼섬, 시마네현, 돗토리현의 해민들이 주로 다녔는데, 독도는 이정표와 피항지 역할을 하였다. 처음에는 울릉도를 다니면서 해산물과 산림자원을 채취하다가 후에는 독도에서 강치잡이를 주로 하였다.

동해안에서 동쪽으로 항해하면 울릉도가 먼저 보이므로 독도를 보기 쉽지 않다. 북쪽의 함경도 쪽에서는 가을철에 북서풍을 이용하여 남동쪽으로 항해하고 반대로 서풍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한다. 반대로 귀항할 때는 남동풍이나 동풍을 타고 서쪽으로 이동한다. 남쪽의 경상도, 전라도에서는 봄·여름철의 남동풍을 이용하여 북동쪽으로 항해하고, 가을철의 북서풍을 타고 남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므로 북쪽이나 남쪽에서 항해하면 독도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동해상을 지나는 저기압이나 태풍의 영향으로 폭풍을 만나게 되면, 먼저 돛을 내리고 파도에 전복되지 않으려고 사투를 벌이다 방향을 잃고 바람의 방향이나 해류를 타고 표류하게 된다. 다행이 폭풍이 멎어 날이 개어 성인봉(984m)을 찾으면 방향을 잡아 목적지로 올 수 있는데, 센바람을 만나 멀리 이동하게 되면 인근에 섬이나 육지가 보이면 살아날 희망이 있으나 섬이나 육지가 보이지 않고 해류를 타게 되면 식수와 식량이 있을 때 까지 표류하는데 동해상에서 표류하면 일본, 러시아까지도 갈 수 있다.

1108년 일본사 고려전(日本史 高麗傳)에 의거하여 우릉도인(芋陵島人)이 이나바(因幡:鳥取県)에 표류하여 비용과 식량을 공급해주고 본국에 돌려보냈었다는 명문이 있다. 그리고 주에 그 인용한 서적을 들어 권기(權記) 및 이조려초(李朝麗草)라고 하였다. 또 공임집(公任集)을 인용하여 “신라 우루마도 사람이 이르렀다. 우루마도는 곧 芋陵島(울릉도)이다.”라고 했다.(1881년 竹島考證 3권과 竹島版圖所屬考)

우릉도(울릉도)에서 표류하여 일본 돗토리현으로 갈 때는 독도를 지나야 갈 수 있다. 갈 때는 일기가 나빠서 못 보았을 수도 있지만 회항할 때는 일기가 좋은 날 출항하므로 반드시 독도를 스쳐 지나거나 들릴 수도 있다.

1425년(세종7) ‘무릉도(茂陵島)에 들어갈 때 바람 때문에 표류했던 수군(水軍)인 평해(平海) 사람 장을부(張乙夫) 등이 일본국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처음에 수군 46인이 한 배에 타고 안무사(按撫使) 김인우(金麟雨)를 수행하여 무릉도를 향해 갔다가, 갑자기 태풍이 일어나 배가 부서지면서 같은 배에 탔던 36인은 다 익사(溺死)하고, 우리들 10인은 작은 배에 옮겨 타서 표류하여 일본국 석견주(石見洲)의 장빈(長濱)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여 멀리 일본 시마네현까지 표류하였다가 돌아왔고, 반대로 1777년(정조2)에는 일본 토원군 해민 17명이 추전(아키다)지역에 쌀을 사러 갔다가 약1,000km 떨어진 삼척까지 표류하였다가 돌아갔다.

최근 북한 어선들은 연료 부족 상태에서 어로활동을 하다가 가을철의 강한 북서풍을 만나 동쪽으로 밀려 대부분 일본의 북서쪽으로 표류한다. 선인들의 배는 돛과 노를 이용하므로 어느 정도 살아날 가망이 있지만 오늘날 어선은 바람을 만나 표류하다 바람이 멎으면 느린 해류를 타고 한없이 흘러 다니다 대부분 아사 및 동사를 하게 된다. 북한의 어선이 일본에서 발견되는 건이 연중 수백 건이라고 하며 그 중에서 운 좋은 생존자는 몇 사람 밖에 안 된다. 울릉도 대풍감 인근에서 발견된 북한 선박(2018.1.8.)은 선원 4명 모두 사망하였다. 이와 같이 동해상에서 표류하다 보면 독도를 발견하는 선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 어선들은 연료가 떨어지면 독도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멍텅구리 선박들이다.

울릉도·독도 근해에서 표류하다 보면 쿠로시오의 영향으로 일본으로 갈 수 있고 반대로 동해안으로 다시 돌아 올 수도 있다. 대부분의 쿠로시오 해류는 일본 서해안으로 가는데 운 좋게 작은 섬인 독도를 만날 수도 있다. 이 섬에는 샘과 동굴이 있어 식수와 비바람을 해결할 수 있고, 전복 등 해산물이 풍부하고 강치와 같은 포유류가 있어 식량을 해결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는 함경도 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경상도와 강원도에서도 전해진다.

숙종실록 22년(1696년 9월25일) 안용복은, 제가 앞장서서 말하기를, “울릉도는 본디 우리 지경인데, 왜인이 어찌하여 감히 지경을 넘어 침범하였는가? 너희들을 모두 포박하여야 하겠다.” 하고, 이어서 뱃머리에 나아가 큰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본디 송도(松島)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 하러 나왔다. 이제 본소(本所)로 돌아갈 것이다.” 하므로, “송도는 자산도(子山島)로서, 그것도 우리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 하였다. 드디어 이튿날 새벽에 배를 몰아 자산도에 갔는데, 왜인들이 막 가마솥을 벌여 놓고 고기 기름을 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막대기로 쳐서 깨뜨리고 큰 소리로 꾸짖었더니, 왜인들이 거두어 배에 싣고서 돛을 올리고 돌아가므로, 제가 곧 배를 타고 뒤쫓았습니다.

안용복은 1693년 일본에 다녀온 경험이 있어 두 번째는 ‘울릉자산양도감세장(鬱陵子山兩島監稅將)’이라고 자칭하고 울릉도와 독도에서 일본인들을 내쫓고, 그 길로 일본으로 건너가 강력하게 항의하여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땅이 아니다.’는 확약을 얻어냈다. 여기에서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는 시마네현 오끼의 송도(마츠시마:독도까지 거리는 약 170km)라고 생각하는데, 안용복은 당시 일본사람들이 부르는 송도(독도)는 자산도(子山島)로 ‘우리나라 땅’이라고 하였다. 안용복의 자산도(子山島)는 울릉도의 자식(아들) 섬으로 알고 있었거나 우산도(于山島)를 잘못 알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마찬가지로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松島)는 오끼의 마츠시마(松島)를 말하는지, 아니면 당시에는 독도에 소나무가 많아서 송도(松島)라 부르는지 분명하지 않다.

필자는 안용복이 ‘송도(松島)는 울릉도의 자식섬(자산도)으로 그것도 우리나라 땅인데 너희들이 감히 거기에 사는가?’라고 하여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일본인들에게 큰소리를 질러 내쫓았다. 그것은 경상도나 전라도 해민들은 이전부터 독도에 가 보았거나 독도 이야기를 해민들 사이에 전해져서 알고 있었다고 본다.

삼척의 옛 기록인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에는 ‘윤속이 삼척부사로 재임하던 중 염병이 돌아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가 없어 병진년(1796년) 7월 상경하여 사직하였는데, 임금이 여러 번 복귀를 재촉하는 교지를 내렸지만 굳게 사양하여 임금의 뜻을 거부하다 파직 당했다. 이에 윤속은 우릉(羽陵)의 팔륜아사건(八倫兒事件)의 벼슬에 나갔고 벼슬에 나가서 사정을 하소연하는 글을 올렸다. ‘우청도(羽淸島)는 망망(茫茫)한 바다 가운데 있어 그것이 삼척지방(三陟地方)에 소속(所屬)되었다고 하는데,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윤속 부사에 관한 내용은 향토지에 실린 내용과 정조실록(정조19년:1795년)에 실린 내용이 많이 다르나 필자가 사건을 추론해 보면, ‘우릉의 팔륜아사건’은 윤속 부사 부임 이전 1787년(정조11년)에 울산 해척(海尺)들이 울릉도에 가서 어복(魚鰒)과 향죽(香竹)을 몰래 훔쳐 나오다 삼척부에 붙잡혀서 취조하는 과정에서 우청도(羽淸島) 이야기가 나왔다고 본다.(추잇돌, 최잠돌 격군 등 14명)

‘우청도(羽淸島)는 망망(茫茫)한 바다 가운데 있어 그것이 삼척지방(三陟地方)에 소속(所屬)되었다고 하는데,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다’는 내용은 해척(해민)들 사이에는 예전부터 울릉도를 다니면서 동쪽바다의 우청도(독도)에도 다녔는데, 그곳은 강원도 삼척에 소속된 섬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방 관리들은 우청도(독도)를 몰랐고 이 사실은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져 보고되지 않아 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에 빠졌으나 향토지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당시 삼척영진은 오늘날 동해1함대와 같이 강원도 동해안 9개 지역과 울릉도·독도를 관리하였다. 울산의 해척들은 울릉도와 우청도(독도)가 삼척 관할이라는 것도 알고 있으면서도 멀리 울릉도·독도를 몰래 다니면서 어복과 향죽 등을 잡고 채취하러 다녔다.

필자는 우청도(羽淸島)의 우(羽)란 두 개의 섬이 멀리서 보면 새가 양 날개를 펼친 모습으로 보이고, 청(淸)은 실제로 독도에 올라보면 동도와 서도 사이가 2-3m정도로 얕아 맑고 푸르게 보이기 때문에 ‘양 날개를 펼친 맑고 푸른 섬’이라고 풀이하였고, 독도의 여러 이름 중에서도 우청도(羽淸島)가 가장 멋진 이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부산에서 창간된 민국일보 1962년3월19일자 돌섬(석도:독도)의 기사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거문도에 사는 87세의 김윤삼 노인은 20세(1895년)에 무역선 5-6척으로 원산-울릉도-부산, 쓰시마를 다니며 장사를 하였다. 울릉도에서 나무를 베어 뗏목을 만들었는데 화창한 날에는 동쪽바다 아득히 섬이 보여 나이 많은 뱃사람에게 물어보니 돌섬(석도:독도)이라 하였다.

일찍이 해척(해민)들 사이에서는 조선 초부터 독도의 사실들이 많이 알려져 있었고, 특히 안용복은 독도를 지나 일본에 건너가서 자산도(송도)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고 막부의 확약을 얻어 내었으며 이후 약 190년간 일본인들의 출입을 근절 시켰다.

이사부와 안용복, 독도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동해(일본해)의 울릉도와 독도를 두고 과거부터 양국 해민들 사이에는 울릉도의 풍부한 산림과 산삼, 전복, 해삼, 미역, 가재(강치) 등을 채취하거나 잡으려고 경쟁하였다.

512년 이사부는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목우사자를 이용한 기만전술로 우산국을 복속하였고 향후 200여 년간 왜구 및 왜인의 침입을 근절하여 일본의 동해 진출을 막아왔다. 11세기 초, 동여진의 일본 약탈을 계기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항해하는 울릉도항로가 개척되어 일찍이 함경도 해민들은 울릉도를 다니면서 독도를 알고 있었다고 본다.

15세기 초, 세종 때부터 함경도를 중심으로 이상향의 섬인 요도를 찾게 되었는데, 당시 울릉도로 도해하면서 어떤 사람은 미지의 섬인 요도(독도)를 보았을 것이고 이 섬 이야기는 부풀려져서 이상향의 섬으로 발전되었다고 본다. 급기야 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요도를 찾으려고 했으나 찾지 못하고 포기하였고 울릉도 주민을 퇴소시키는 공도정책을 실시하였다. 일본은 16세기말 임진왜란이 끝나고 17세기 초, 나라가 어수선한 틈을 타서 돗토리번 해민들이 1년에 한 번씩 울릉도·독도에 건너와 전복, 강치를 잡아 갔다. 그러다 안용복의 1693년과 1696년의 도일사건을 계기로 일본인의 ‘다케시마도해금지령’이 시행되어 일본인들의 울릉도·독도 출입이 근절되었고, 조선도 동해바다에 인접한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의 관리들에게 해민들을 단속하게 하고 2-3년마다 수토사를 보내어 울릉도·독도를 정기적으로 수토하게 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 대비하여 1904년, 독도에 망루와 해저전선을 설치하면서부터 독도는 1945년까지 41년간 일본에게 실효지배를 당하였다. 그러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우리의 영토로 돌아왔고 지금은 우리가 실효지배를 하고 있다.

이사부와 안용복은 독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이사부는 우산국을 복속하여 우산국의 부속도서인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편입하였고, 안용복은 자기를 희생하며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 일본인들의 ‘다케시마도해금지령’과 ‘켄로쿠다케시마사건’으로 일본인의 침입을 막았고 이것은 오늘날 까지 유효하다. 과거의 역사를 보나 위치를 보나 명백한 우리의 영토인 독도를 잘 알고 잘 보존해야겠다. 우리는 독도 12해리 영해와 함께 200해리의 영유권을 지켜나가고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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