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서 11월은 달력의 마지막 달이다. 이런 시기에 교회는 위령 성월을 지내며 죽음을 묵상하며 지낸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이나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톨스토이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다고 했으며, 아우구스티누스가 밝힌 저서 신국론에는 삶이란 죽음으로의 점진적인 굴복이어서 우리는 우리에게 할당된 나날 중 한 부분을 매일 죽음에 바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죽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일이며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죽을 수 없다. 이렇게 죽음은 보편적이고 불가피하다는 것과 함께, 대체불가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 부정적인 의미만 가진 것은 아니다.
언젠가 나도 그 중에 한 명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죽음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죽음은 모든 인간의 숙명이다. 죽음은 모두에게 예외 없이 찾아오는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조차 거부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부분의 건물 엘리베이터에는 4층 표시가 없다. 4라는 숫자가 죽음을 떠올리는 숫자 때문에 전통적으로 피해온 것이라고 어느 문헌에는 쓰여 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 황제가 독살 의혹 속에 치러진 그의 장례는 3·1운동이 일어난 하나의 계기가 되었지만 3·1 운동은 일본의 비인도적인 진압으로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으나, 세계 여러 나라에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던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이 경찰이 발포해 사상자가 발생하여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4·19 혁명의 도화선에 결국 이승만 자유당의 장기 집권은 막을 내렸고, 20년이 지난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은 비록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진압 당했지만,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로 태어나 문재인대통령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참석자의 손을 잡고 불러주었다.
그리고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학생인 박종철이 경찰 고문으로 사망, 6월 9일에는 연세대학교 학생인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부상당하다 7월 5일 사망하여 이 사건을 계기로 6월 민주항쟁이 활화산이 되자 노태우는 6·29 선언을 하게 되었고, 제 6공화국 새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거쳐 1987년 10월,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진 우리나라 국민의 희생이 있었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다 내게로 오라
이런 슬픔과 고통의 굴레를 벗어나면서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세계 10위권에서 질주하고 있는데 작년 이쯤 촛불을 들고 이게 나라냐면서 대통령을 압박하였고 결국 헌법재판소에서는 파면의 형량이 내려 올 5월 10일 현 정부가 탄생되었으며 선거공약 하나, 적폐청산이라는 카드가 지상파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성경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아” 라는 구절이 있다. 스스로 혹은 타의에 의해 이 세상에서 힘겹고 피곤하고 억눌린 인생을 살아가는 자 (마태복음 11장 28~ 30절)은 힘겨운 삶의 현장에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다 내게로 오라하셨다, 즉,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셨다. 이 뜻은 죽음도 무거운 짐이고 형벌을 받고 자유로움을 잃는 것도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으로 본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령 성월은 우리의 죽음을 기억하면서도, 우리의 삶의 가치를 생각하는 시간이다. 또한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이 꿈꿔왔던 세상을 우리도 함께 꿈꾸는 시간이라고 도 한다. 무거운 짐을 지고 죄 값을 받고 있는 사람은 죽어 있는 목숨은 아니지만 그 오랜 시간을 버티려면 주검과 같은 목숨이다.
정유년 한해를 떠나버릴 때와, 무술년 새해를 맞아갈 때 쯤 악법을 저지를 죄인과 흉악범이 아닌 죄수 중 무거운 짐을 지고 회개하고 있는 죄수들에게 사면의 베품으로 이 세상을 다시 열어주었으면 좋겠다는 필자의 생각을 내려놓으면서 정유년 칼럼을 마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