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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70년도로 거슬러 가본다. 그때 나는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고 지금의 전두시장에서 가게를 운영하면서 살고 있는 여인이다. 그 시절에는 도계가 광산 전성기라 객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때 전두시장 안은 정말 사람에 걸려 넘어질 정도로 붐볐으며 아침이 열리면서 도계역에 열차가 들어오면 그야말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시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비좁다 못해 하루 종일 왁자지껄 정신을 쏘옥 빼 놓을 만큼 삶의 물결을 이룬 마을이였다.
기차역 광장에는 장사꾼들이 온통 진을 치고 하루 종일 야시장 장사가 판을 쳤고, 전두시장은 시장대로 장사진을 치며 쉴 틈 없이 붐볐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가져 본다. 그 시절 도계를 누리며 울고 웃던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시절에는 장사가 정말 잘되었는데 지금은 무엇이 장벽을 쳤는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야말로 사람이 넘쳐 날 만큼 천지였는데. 월급날이면 노란봉투에다 돈을 받아서 그 노란봉투째 들고 시장에 와서 시장을 보면 날치기 범들이 꼭 뒤 따라 다녔고, 돈 봉투째 날치기 범들에게 빼앗긴 아낙네들은 울고불고 돈 잊어 버렸다고 아우성쳤던 그 모습들, 그러고 난 후 모든 물건을 외상으로 다 사들이고 다음 달 월급을 받아서 갚았던 그 빛바랜 시절이 있었는데…
그리고 그때는 기차역 옆에 통운이라는 곳에서 상인들이 외지에서 모든 물건을 사서 부치면 리어카가 줄을 지어서 물건을 싣고 시장입구서부터 시장 끝까지 배달을 해줬다. 지금은 리어카 보기에도 힘들 정도로 귀한 물건이 되고 말았지만, 그때는 유연탄을 사용하면서 달리던 증기기관차(미카) 완행열차가 유일한 운송 수단이었다.
묵호에서 생선장사 아낙네들이 생선 팔려 도계로 오는 완행열차에 생선을 고무 통에 몇 통씩 담아오면 반나절도 걸리지 않아 금방 바닥을 드러낼 만큼 장사는 호황을 누렸다.
그 시절에는 생선 팔 자리가 부족해서 자리싸움도 참으로 많이 했다. 야채장사도 보따리를 이고 지고해서 동해 북평 장사꾼들도 물건을 파기 위해 장터로 모인다. 많이 바쁜 철에는 새벽 3시부터 일어나야 했고, 그 당시는 주먹 탄이란 걸 태워서 깨도 볶고 짜면서 작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그 시절이 아주 먼 옛날같이 느껴진다. 지금도 나는 전두시장에서 가계를 운영하고 있지만, 하루 종일 있어도 지나치는 사람을 구경할 수 없을 정도다. 사람이 그리울 정도로 지금 전두시장에는 젊은이들을 보기가 힘들고 객지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고 지금 남아 있는 60세 이상 노령인들이 명맥을 겨우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서 잠깐 나의 시아버님도 1952년도쯤에 도계 흥전항에 입적하셔서 1969년도까지 항내에서 근무하시다가 퇴직 후 진폐로 많은 고생을 하셨다. 1999년도 추운 겨울 어느 날 세상을 떠나셨고 나의 남편도 총각시절 아버님을 따라 도계 흥전항에서 일을 하다가 조금 다쳐서 치료를 받다가 군대를 갔다.
그때는 군복무가 36개월 긴 복무였다. 제대 후 또 다시 생계수단인 탄광에 다시 입적해서 대방탄광이라는 곳에서 탄을 캐는 막장일을 하면서도 마스크도 없이 탄가루를 속수무책으로 마셔야 했고, 그 시절만 해도 모든 장비가 부족한터라 발파소음 때문에 청력도 많이 나쁜 상태였다.
진폐 의증도 있지만 몇 년 동안은 일주일 건강검진도 받았지만 지금은 아무런 혜택도 받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 나의 남편은 몸이 많이 불편하고 일흔이 훨씬 넘은 나이에 청력도 많이 좋지 않은 상태이다.
지금의 전두시장은 열악한 조건을 가진 재래시장이다 보니 오고 가는 손님도 별로 없지만 고향을 삼고 도계를 지키며 여생의 노후를 보내고 있지만 내 마음의 풍선은 아름다운 하늘가에서 훨훨 날아가고 있기에 머지않아 희망의 씨앗을 찾아오리라고 생각하며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기에 이 편지에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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