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590호 2016년 11월 25일자
얼마 전 종영한 박보검 주연의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 내시부 수장 한상익(장광 분)이 홍경래의 난과 관련된 인물로 그려졌다. 픽션이었지만, 고려 공민왕이 환관 최만생에게 살해된 것을 보면 엉뚱한 설정은 아니었다. 고려 초까지 내시는 명문가 자제들로 구성된 왕의 측근 엘리트 집단이었다. 이에 반해 환관은 거세된 자들로, 왕을 보필하며 허드렛일을 했다. 그러나 고려 중기 이후 세력을 확장한 환관들이 내시 직을 주로 맡으면서 내시와 환관은 구별 없이 쓰였다.
영화 “왕의 남자”에 나오는 처선의 모델이었던 내시 김처선은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일곱 임금을 모셨다. 그는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면서, 내시 최고 관직인 상선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런 김처선이 기생에게 빠진 연산군에게 직언을 하다 죽임을 당했다. 이후 연산군은 김처선의 “처”자 사용마저 금지시켰으며 심지어 처서(處署)를 조서(署)로 바꾸고, 처용무(處容舞)의 이름도 풍두무(豊豆舞)로 바꿔 버렸다.
김처선 못지않게 장수한 환관은 김사행이다. 김사행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다섯 명의 임금을 모셨다. 노국공주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등용한 요승(妖僧) 신돈과 환관 김사행이 공민왕의 최측근으로 보면 환관의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태조 이성계가 가장 총애했던 김사행은 경복궁을 설계했다. 이성계는 대간보다 환관을 신뢰했다. 김사행은 왕자의 난 때 단종을 지키려다가 세조(수양대군)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김처선처럼 환관 권력이 직언으로 최후를 맞는 경우도 있었지만, 권력의 맛에 취한 이들도 많았다. 왕을 그림자처럼 보좌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권력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왕의 독주를 막기 위한 다양한 제도가 있었다. 그중 가장 독특한 것이 사관(史官) 제도였다. 사관의 입회 없이는 왕이 업무는 물론 신하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사관은 통치행위와 관련된 왕의 모든 말과 행동을 기록했다. 왕이 신하와 은밀히 독대를 갖게 되면 사관은 물론 신하들까지 들고 일어나 반대했다.
왜 반대하고 나섰을까, 왕의 비밀스러운 만남은 정사에 사감을 실을 여지가 클뿐더러 독대자가 부정청탁이나 모략을 꾸밀 수 있기 때문이며, 가혹할지 몰라도 왕의 사생활 또한 사관들의 취재 영역이었다.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사관들이 왕의 침실까지 넘봐, 여자 사관을 입실토록 요구하자 견디다 못한 왕이 수용했다는 내용도 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은 기록에 없을까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종 4년(1404) 2월 8일의 일이다. 늘 자신의 뒤를 쫓아다니는 사관의 눈을 피해 사냥에 나섰던 태종은 노루를 쫓다가 낙마하고 말았다. 창피했던 그는 신하에게 “이 일을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일렀지만 사관은 왕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는 말까지 기록했다.
사실 기록을 목숨처럼 여겼던 사관들은 왕의 잘못도 적나라하게 적었다. 명종 17년(1562) 7월 12일의 기록에는 “왕이 기쁨과 분노가 일정하지 않아 아침에 벌을 주었다가 저녁에는 상을 주고, 또는 저녁에 파면시켰다가 아침에 다시 임명하니 환관들이 임금의 마음을 미리 헤아려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숙종 33년(1707) 1월 25일에는 “왕이 대신들을 별다른 이유 없이 오전 아홉시부터 낮 한 시가 넘도록 대기토록 했다. 임금이 대신을 예우하지 않아 통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라고 기록돼 있다.
세월호 참사 당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의혹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여전한데 그 기록은 남겨져 있을까. 청와대와 정부는 지금까지 줄곧 대통령이 정상적인 집무 중이었다고 답했다. 대통령도 사생활은 있어야 하지만 근무 시간의 일거수일투족은 국민의 것이다. 봉건시대에도 왕의 근무 시간은 기록되었다. 떳떳하다면 7시간의 행적을 밝혀 의혹을 해소하면 얼마나 좋은 뉴스는 물론 시끄러운 정국을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 잊지 않을까 란 생각을 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