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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8호 2016년 5월 13일자
예전에는 얼굴을 맞대야만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이었는데, 이제는 굳이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소통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렇듯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은 변해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변하지 않는 자기 자신이 있다는 집착심을 불교에서는 아상(我相), 아집(我執)이라는 글을 눈으로 읽었고 지인으로부터 귀로 들었다.
산들 바람이 불어도 거센 비바람이 불어도 버들나무는 바람 따라 흔들릴 뿐 군소리를 하지 않는다. 싫은 다소의 바람이 있어도 그냥 흔들리고 있는 건 밑동과 뿌리가 늘 고요하기에 가지만 한들한들 놀아줄 뿐이다.
버들나무와 달리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군소리도 많고, 늘 분주하기만 하다. 나는 내가 누군지를 확실히 알게 되면 지금의 갈등과 괴로움에서 얼마나 일찍 많이 줄일 수 있을까 싶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자기 자신을 고정된 것으로 보는 아집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하나의 존재나 사물에 대해서도 고정불변이란 그것 때문에 집착하는 것을 우리는 법집, 상(法執, 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모든 집착심에서 갖가지 근심, 걱정이 나오는 것은 이 아상과 법상에서 시작되며, 집착심이란 어떤 일이나 사물(대상)에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매달리는 마음에 잇다는 뜻이다.
한 이야기로 예를 들어보겠다.
이 글은 어느 증심사주지 스님께서 요강인가, 양념단지인가 칼럼에 게재된 글을 인용한다.
거실 한쪽 구석,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 조그만 항아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항아리는 시어머니가 젊은 시절에 사용하던 요강이었다. 이것은 이 집 며느리도 몰랐던 사실이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생 손자가 그 항아리를 보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에요~~ 어머니가 엉겁결에 대답하길, 응. 양념을 넣어두는 양념단지란다.
며칠 후 며느리가 양념을 보관할 용기를 찾고 있을 때, 손자가 거실의 항아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에 넣어 두면 되잖아요.
이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가 기겁을 하며 말하길 이 녀석아, 요강에다 양념을 넣으면 어떡하니, 이튿날 소변을 막 가리기 시작한 손녀가 거실에서 갑자기 소변 볼 곳을 찾자, 할머니는 그 항아리를 가리켰다, 옆에 있던 손자가 큰일이나 난 것처럼 말했다.
할머니, 양념단지에다 오줌을 누게 하면 어떡해요. 사소한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아주 중요하다. 거실 한 구석에 놓여있는 저것은 요강인지, 양념단지인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냥 항아리라고만 해야 될지 웃기는 이야기다.
항아리는 고요한데 쓸 때 없는 다툼만 보인다
눈앞의 저것은 소변을 보면 요강이지만, 양념을 넣으면 양념단지가 되는 것이다. 흙을 넣고 꽃을 키우면 화분이 되는 것이고, 맑은 물을 붓고 금붕어를 키우면 어항이 될 수 있고, 까치에게는 둥지도 될 수 있다.
그러나 할머니는 언제 어디서나 요강으로만 보고, 손자는 언제 어디서나 양념단지로만 보기 때문에 논쟁과 갈등은 없어질 수가 없다. 교수가 학생을 가르칠 때는 교수이지만, 교수가 지게를 질 때는 지게꾼 일뿐이다. 교수가 지게질 때 교수라고 우기는 것은 아집 때문이다. 할머니와 손자는 바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거실에 있는 항아리를 두고 요강이다. 양념단지다. 항아리다. 화분이라고 주장하며 논쟁을 벌이거나 싸우는 것은 에너지 소모에 불과하다. 항아리는 아무 소리 없이 고요한데 사람들만 쓸데없이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들,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다툼이나 갈등과 분열 또한 이와 같다.
언제 어디서나 나는 내 자신뿐이고 내가 고집 하는 것은 모양이 바뀌지 않는 특정한 모양으로 보이는 사물과 착각 때문에 끝까지 우겨 될 뿐이다.
석가탄신일도 얼마 남지 않아 고등학교시절 한문 공부하던 사찰을 찾아볼까 한다.
지도해주시던 스님은 아니 계시겠지만 매일 열고 닫았던 문고리나 문은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들의 사고방식도 할머니의 그것과 별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란 이 한마디가 행복과 불행, 욕심과 원망으로 돌아와 원수 아닌 감정을 갖게 하는데 이것을 순간에 다 잊어야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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