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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은 종종 영웅의 탄생과 연결된다는 일화가 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알에서 태어난 “빛의 자식”이다. 그의 어머니 유화부인은 해를 상징하는 하늘의 존재와 만나 그를 잉태했으며 빛은 그를 이끌고 길을 비추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도 제시했다.
반면 달빛은 드러내기보다 감싸는 빛이다. 마음의 표정을 비추고, 낮의 이성으로는 닿지 못하는 무의식의 결을 스치게 되고 밤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그 숲으로 고요히 스며들게 되어 있다.
초여름에 들어서니 새맑은 하늘 아래 여기저기 접시꽃이 많이 피었다, 접시꽃은 초가의 사립문 옆에나 장독대, 초등학교 교정, 완행열차가 쉬어가던 간이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으며 길섶에도 자홍색, 흰색, 붉은색으로 치장한 접시꽃들이 소담하게 피어 고운 자태를 드러내는 여름꽃이다.
시 “접시꽃 당신”은 구절구절마다 애처롭다.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겠습니다.”라고 시인은 글을 남겼다.
그런데 승용차를 몰고 진도 앞바다로 돌진해 처자식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40대 가장이 카드빚과 임금체불 조사에 따른 압박에 못 이겨 범행한 뉴스가 우리를 슬프게 했다.
이처럼 자녀를 살해하는 사건은 이제 낯설지 않다. 경제난과 가족 갈등, 정신질환 등 다양한 배경이 존재하지만, 반복되는 비극 속에는 공통된 사회적 병리가 자리하고 있다. 첫째는 극심한 경제난이다. 소득 양극화와 불안정 노동, 사각지대에 놓인 사회안전망은 개인을 점점 더 고립시키고,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단순한 채무 문제가 아니라, 출구 없는 구조적 불안이 극단적 범죄를 부추기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는 왜곡된 인식때문이다. 내가 없으면 아이도 살 수 없다는 비뚤어진 가족주의는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보지 않고 부모의 연장선으로 취급하게 만든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이 문화로 고착돼 있다는 점이다.
법 제도의 허점도 여전하다. 우리 형법은 부모를 살해한 존속살해에 대해서는 가중 처벌을 명시하면서, 자식을 살해한, 경우에는 별도의 조항 없이 일반 살인죄로 다룬다. 오히려 영아살해의 경우는 최고 징역 10년으로 형량이 더 낮다. 더 늦기 전에 사회 전체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직시해야 한다. 부모가 자식을 자기 것처럼 여기는 잘못된 인식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동시에 위기에 처한 가정을 조기에 발견하고 지원할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 가족 내부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학대가 더 이상 은폐되지 않도록, 교사, 의사, 이웃 등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감시체계도 강화돼야 한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니다. 이 단순한 진실을 지키기 위해, 법과 제도, 문화 전반에 걸친 성찰과 변화가 절실하다.
접시꽃을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린 사람은 단연 시인 도종환이다. 그는 결혼 6년 만에 암으로 세상을 등진 아내에게 바치는 절절한 사부가를 모아 시집 “접시꽃 당신”을 펴냈다. 1986년 출간된 이 시집은 당시 15만 부 이상이 팔려나가며 수많은 여심을 흔들어 놓았는데, 키 크고 잘생긴 외형과 다르게 접시꽃은 여느 꽃들이 가진 황홀하고 진한 향기는 없다.
하지만 누가 보든 말든 철이 되면 늘 그 자리에서 피고 지며 집을 지키고 손님을 맞이한다. 그래서 더욱 소박하고 꾸밈없는 꽃으로 사랑을 받는 것처럼, 가정에 아내가 없고 자식이 없으면 인생살이를 무슨 의미로 사는 건지 묻고 싶다.
시끄러웠던 대선은 끝났고 정권도 바뀌었다. 새로운 날들의 시작이다. 혼군(昏君)과 용군(庸君)이 설치던 무도한 시절이 지나갔으니, 북소리가 바뀌면 춤도 달라져야 한다는 나이지리아 하우사 부족의 속담처럼 이제 국민들은 바뀐 북소리에 따라 새롭고 신명 난 춤을 추며 아픔과 슬픔 없는 사회에서 사는 게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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